(경제일보, 2026.08.12) [데스크 칼럼] 증도가자 앞에서 누구의 이권을 따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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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6-08-1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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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일보] 국가유산청이 13일 고려시대 금속활자로 알려진 ‘증도가자’의 문화유산 지정 재심의 여부를 결정한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증도가자의 진위와 2017년 심사 과정을 다시 살펴보겠다고 밝힌 지 10개월 만이다.
증도가자가 진품으로 인정되면 우리나라 금속활자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1377년 인쇄된 직지보다 최소 138년 앞선 시기에 금속활자가 사용됐다는 사실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지가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라면 증도가자는 활자 자체가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결론은 증거가 말하게 하면 된다. 진품이라는 근거가 충분하면 인정하고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 기존 학설이나 전문가의 이해관계, 과거 심사의 체면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런데 증도가자가 지난 16년 동안 겪어온 과정을 보면 그런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의문이 남는다. 2010년 존재가 알려진 뒤 국내외 여러 기관에서 연대와 성분 분석이 진행됐고 문화재청이 발주한 연구도 이어졌다. 2014년 연구에서는 다보성갤러리 소장 활자 가운데 상당수가 ‘증도가’ 인출에 사용된 활자라는 결론이 나왔다.
처음 보물 지정 신청을 권유한 곳도 당시 문화재청이었다. 문화재청 관계자가 직접 소장자를 찾아가 지정 신청을 권했다고 한다. 그런데 신청이 들어온 뒤 심의에는 6년이 넘게 걸렸고 2017년에야 열린 문화재위원회에서 지정이 부결됐다.
따져야 할 것은 부결이라는 결론보다 그 과정이다. 당시 부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출처와 소장 경위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장자는 일본에서 국내로 들어온 뒤 여러 사람을 거쳐 현재 소유자에게 넘어오기까지의 경위를 제시했다고 한다.
문화재 지정 신청 이후 만들어진 규정을 출처 판단에 적용했다는 논란도 불거졌다. 전래 유물 가운데 처음 발견된 장소와 소유 경위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증도가자에만 유독 출처를 엄격하게 따졌다면 국가유산청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더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은 따로 있다. 당시 심사에 관여한 한 전문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이 소유한 물건을 보물로 지정해 값이 뛰면 누가 책임지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문화유산의 가치를 판단해야 할 사람이 소유자의 재산상 이익부터 걱정했다면 심사의 출발부터 잘못됐다. 보물 지정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소유자가 누구인지도, 지정 뒤 가격이 얼마가 되는지도 아니다. 그 유물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 국가의 일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더 무거운 문제가 제기됐다. 2017년 심의를 담당했던 공무원이 활자 조판시험 결과를 보고하면서 중요한 내용을 누락하고 통계 분석을 잘못 적용해 결론에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다. 감사원이 관련 제보를 조사한 뒤 국가유산청에 재검토를 권유했다는 내용도 국정감사 과정에서 공개됐다.
이 정도 문제가 제기됐다면 이번에는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한다. 과학적 분석과 서지학적 근거를 다시 확인하고 기존 연구에 오류가 있었는지도 따져야 한다. 새로운 자료가 있다면 공개하고 최종 판단의 근거도 국민과 학계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내놓아야 한다.
그보다 먼저 정리할 일이 있다. 심사하는 사람이다. 2017년 심사에 관여했던 인사 가운데 일부가 지금도 국가유산위원회 관련 분과에 몸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당시 심의 실무를 맡았던 공무원도 국가유산청에 남아 있다.
과거 심사에 중대한 문제가 제기돼 다시 판단하는 자리라면 당시 판단에 관여했던 사람은 빠지는 것이 맞다. 공정성을 의심받을 사람이 다시 판단자로 들어오는 순간 재심의 의미부터 흔들린다.
법원에 제척과 기피, 회피 제도가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판단의 공정성을 믿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면 아예 재판에서 빠지도록 한다. 국가기관의 결정은 결과뿐 아니라 누가 어떤 절차로 결정했는지까지 신뢰를 얻어야 한다.
문화유산 심사라고 다를 까닭이 없다. 감사원 조사와 국정감사에서 과거 심사 과정의 문제까지 제기된 사안이다. 당시 관계자들이 다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이번에 어떤 결론을 내놓더라도 논란은 끝나지 않는다.
증도가자를 둘러싸고는 학계의 이해관계가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도 오래 따라다녔다. 직지 연구로 명성을 쌓은 일부 전문가들이 증도가자가 인정될 경우 자신들의 연구 성과나 학계에서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을 우려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어떤 학자가 평생 직지를 연구했든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다시 살펴봐야 한다. 그것이 학문이다. 기존 연구를 지키려고 새로운 자료를 밀어낸다면 학문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이 된다.
역사 앞에서 학자의 권위가 기득권이 돼서는 안 된다. 수십 년 동안 통설로 받아들여진 학설도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바뀔 수 있다. 학문의 권위는 과거의 결론을 끝까지 지키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을 고칠 수 있을 때 생긴다.
공무원 조직의 체면도 역사보다 앞설 수 없다. 2017년 판단이 잘못됐다면 지금 고치면 된다. 잘못된 결론을 지키는 것이 조직의 체면을 세우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지키려고 역사적 판단까지 붙들고 있었느냐는 질문만 남긴다.
이 문제는 국익과도 맞닿아 있다. 증도가자가 실제 13세기 고려 금속활자라면 그 가치는 소장자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이 세계 인쇄문화사에서 얼마나 앞선 기술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우리 문화유산의 국제적 위상에도 영향을 준다.
그런 가능성이 있는 유물을 두고 개인의 이해관계와 학계의 체면부터 계산한다면 손해를 보는 쪽은 대한민국이다. 역사 앞에서 사익을 먼저 따지는 순간 국익은 뒷전으로 밀린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제 그 말을 절차로 보여줘야 한다. 과거 심사에 문제가 있었다면 당시 관계자를 빼고 새로운 전문가들에게 판단을 맡기면 된다.
누구의 이권도, 학문적 자존심도, 관료 조직의 체면도 걷어내야 한다. 남겨야 할 것은 증거와 사실뿐이다. 역사는 어느 학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어느 공무원이 지켜야 할 과거의 결재 서류도 아니다. 증도가자가 진짜라면 대한민국의 역사로 인정하면 되고 아니라면 누구나 납득할 근거를 대면 된다.
국가유산청이 이번에 지켜야 할 것은 2017년의 결론이 아니다. 역사 앞에서 국가기관이 가져야 할 신뢰다.
경제일보 한석진 기자 sjhan0531@kyungjeilbo.com